세계사 교육과 문학 독서에서 여전히 유럽 중심의 시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도 고유의 풍부한 서사와 세계관을 담은 고전들이 존재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말레이 세계의 고전이자 역사·신화적 서사시인 『수탄 이스칸다르(Sulalatus Salatin)』, 또는 『슬랄라투스 살라틴』입니다. 이 글에서는 유럽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말레이 고전을 통해 다른 문명의 세계관과 역사 서술 방식을 이해하는 시도를 해봅니다.
동남아시아에도 ‘왕조 서사’는 존재한다
『수탄 이스칸다르』는 15세기 말라카 술탄국의 역사와 그 정통성을 설명하기 위한 고전으로, 말레이어로 기록된 대표적인 역사문학 작품입니다. 흔히 서양의 왕조사나 그리스-로마 신화가 중심이 된 고전 교육에서, 동남아 지역은 ‘변방’ 혹은 ‘식민지적 배경’으로만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지 말라카의 건국 신화에 그치지 않고, 신화·이슬람·민속신앙·정치 이념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텍스트입니다. 이슬람이 도입되기 전부터 존재한 말레이 문화와, 이슬람 이후 술탄 권위가 강화되는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내며, 왕권의 신성함과 백성들과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유럽의 『일리아드』가 트로이 전쟁을 중심으로 인간과 신, 정치와 명예를 이야기한 것처럼, 『슬랄라투스 살라틴』은 말레이 세계의 영웅, 신화, 외교, 전쟁, 예언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동남아시아식 ‘영웅 서사’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전 읽기의 다양성 – 비교와 확장의 시도
많은 고전 읽기 프로그램은 서양 중심의 문학만을 소개합니다. 셰익스피어, 단테, 호메로스, 셀서스와 같은 작가들은 중요하지만, 그 외 지역의 고전은 거의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접하는 '세계'는 유럽과 그 주변 국가들에 한정되며, 동남아시아는 교과서 속 간단한 배경지식으로만 소비됩니다.
하지만 『수탄 이스칸다르』를 읽는 것은 단지 한 지역의 역사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명의 다양성과 고전 서사의 보편성을 함께 배우는 행위입니다. 인간이 왜 신화와 정치를 함께 묘사했는지, 종교와 국가 권력이 어떻게 한 사회의 철학을 형성했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질문이 이 작품 안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이 고전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지역의 정체성 형성과 민족 서사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지금도 교육과 국가 이미지에 중요한 텍스트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전 읽기의 지평을 확장하는 시도는 문화다양성과 포용의 시대에 꼭 필요한 지적 습관입니다.
『슬랄라투스 살라틴』이 말하는 ‘왕’과 ‘민중’의 관계
유럽 고전에서는 ‘군주’는 흔히 신의 대리인이자 절대 권력자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슬랄라투스 살라틴』은 군주의 정당성을 단지 ‘출생’이 아니라, 신의 축복과 민중의 지지, 그리고 이슬람 율법의 실천 여부로 설명합니다.
말라카 술탄국의 왕들은 자주 ‘신의 뜻’과 ‘백성의 고통’ 사이에서 고민하며,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권위를 잃거나 망국의 위기에 처합니다. 이는 단순한 왕정 미화가 아닌, 통치자의 책임감과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논의를 담은 구조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수탄 이스칸다르』는 오늘날 민주주의, 리더십, 윤리적 권력 행사에 대한 토론에도 풍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즉, 고전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처럼, 말레이 고전 역시 오늘날 우리 사회와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철학을 품고 있습니다.
결론: 고전 독서의 지도를 바꾸는 첫걸음
『수탄 이스칸다르』를 읽는다는 건 단지 동남아 고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학과 역사, 철학과 정치가 결합된 세계 고전의 지도를 재구성하는 일입니다.
유럽 중심 고전만을 반복해 읽는 것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고전에서 배우는 태도와 가치는 21세기 인문교육의 다양성과 균형을 되찾는 핵심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텍스트가 아니라, 더 다양한 세계를 품은 텍스트입니다. 『슬랄라투스 살라틴』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